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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등산의 매력

- 오영철 KBS 인재개발원 교수

[장면1]

(장면-1) 북한산 삼천사 계곡푹푹 찌는 복날에 북한산 삼천사 계곡에서는 폭소가 시원스레 터져 나왔습니다. 대학 동창들로 구성된 산행팀의 잡담시간, 화제가 섹스로봇으로 넘어가자 분위기는 아연 활기에 넘쳤습니다.

"할겨?"

"혀"

팔도의 인간들이 모였지만 대화는 짧고 간결한 충청도 말투가 주도했습니다. 섹스로봇과 나눌 수 있는 기상천외한 환타지를 들으며 다들 배를 잡고 자빠졌습니다. 웃통을 벗은 채 발은 시원한 계곡물에 담갔겠다, 화제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섹스이겠다, 멤버는 반갑고 격의 없는 동창이겠다, 박장대소는 끝없이 이어졌고 일상의 스트레스들은 삼복 더위와 함께 잽싸게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장면2]

(장면-2) 한라산의 설경
(장면-2) 한라산의 설경
혹한에 대설, 강풍까지 몰아졌던 2월의 한라산.

입산통제 조치가 발령됐지만 고등학교 동창산악회는 거침없이 제주로 날아갔습니다. 폭설은 하늘의 뜻, 하지만 그에 휘둘리지 않는 건 인간의 의지라고 믿었습니다.

결연한 의지는 하늘마저 움직이는 것일까요? 우리가 도착한 그 다음날, 그토록 완강하게 저항했던 한라산이 3일간의 입산통제를 풀고 마침내 속살을 드러냈습니다. ‘우와~’ 태고의 비경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한라산의 설경속을 걸으며 일행은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혹한을 뚫고 마침내 백록담 정상에 오르자 설경에 취한 가슴이 뻥 뚫리면서 크고 작은 세속적인 미련들도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장면3]

(장면-3) 팔영산 정상에서 필자의 모습
(장면-3) 팔영산 정상에서 필자의 모습
장마철에 찾아간 다도해의 명산, 팔영산은 운무로 가득했습니다. 10미터 앞에는 온통 구름 뿐. 하늘도, 땅도, 바다도 사라지고 모든 경계가 무너진 선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런 운무속에 머물면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경계들도 덩달아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성공이 기쁘다면 실패도 기뻐해야지. 삶이 행복하다면 죽음도 행복해야겠지.

그렇게 변해가는 우리들의 심신에 정상의 청량한 바람이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계곡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정상에선 시원한 바람으로 변하는 게 신기했습니다.

등산길의 8개 봉우리, 하산길의 편백나무 숲을 걸어가면서, 몸과 마음에 배었던 얼룩들이 절로 세탁이 됐습니다.

모름지기 산 정상에 올라 (회당릉절정)

뭇산의 작음을 한번 보리라 (일람중산소)

시인 두보는 시 '등고'에서 등산의 가치를 이렇게 읊었습니다. 내 비록 지금은 쫀쫀하지만 언젠가는 천하제일이 되고야 말겠다는 남아의 기개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등산을 해보면 그 '언젠가'를 기다릴 필요조차 없이 바로 천하제일이 된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산 아래 저 성냥갑 같은 세상을 가소롭게 혹은 측은하게 내려다보면 삶을 대하는 나의 관점도 제왕처럼 대범하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옹졸했던 내 마음에 분해서 펄쩍펄쩍 뛰었던 사연도 대범한 제왕의 마음이 되고 나면 그냥 있을 수 있는 일로 덤덤하게 수용이 됩니다.

이토록 유익한 등산은 무엇보다 심플한 게 특징입니다. 수영처럼 힘겹게 배울 필요가 없고, 골프처럼 값비싼 비용을 지불할 이유도 없으며 나이, 성별, 직업 등에도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 산에 가면 기쁨이 배가 됩니다. 슬프고 외로울 때 산에 가면 말없는 위안을 받습니다. 함께 가도 좋고 혼자 가도 나쁘지 않습니다. 등산은 과연 산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글 오영철 / KBS 인재개발원 교수 , KBS 기자, '2막의 멘탈'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