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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 인문학] '요리의 역설'…"자연의 재료를 문화의 산물로"

요리를 욕망하다, 저자 마이클 폴란

주방을 포기하고 식사 준비를 식품산업에 넘겨준 역사적인 순간.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많은 시간을 들여 음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걸까?

인터넷 포털에는 맛집 소개가 빠지지 않고, 케이블 방송에서는 요리 프로그램이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먹방의 맛있게 먹는 사람들이 화제가 되고 인터넷 먹방 방송도 성황이다. 우리는 정작 스스로 요리하지 않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대형마트에 가면 완성식품은 물론 집에 가져가서 불에 올리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음식이 넘쳐난다. 편의점에서도 이런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 가공식품이 즐비하다. 제철이 언제인지 모를 만큼 온갖 신선한 재료가 즐비하고, 세계 곳곳의 재료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공식품의 늪에 빠져 있다.

한 설문조사를 보면 매년 요리를 덜 하고 간편식품을 더 많이 구매한다. 미국 가정에서 식사 준비에 드는 시간은 어머니 세대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1960년대 중반 이후 절반으로 줄어들어서 이제는 하루에 고작 27분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인들의 경우지만, 이런 추세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요리 이야기를 하느라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요리하는 모습을 더 자주 지켜본다. 요리에 대한 책을 더 많이 읽는다. 실시간으로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레스토랑에 더 자주 간다.

요리에 우리가 정말로 그리워하는 무엇이 있나?

매일 요리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체력이 달리고 지식이 충분치 않다고 느끼지만 우리는 요리가 우리 삶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비극을 볼 준비가 안 돼 있다.

마이클 폴란의 '요리를 욕망하다'는 올바른 요리의 미덕과 가치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류 고유의 활동인 요리는 우리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가족의 삶을 형성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아주 즐거운 일이다. 폴란은 세계 곳곳의 셰프들을 만나고 직접 해봄으로써 아주 미세한 효모의 작용부터 통돼지구이에 이르기까지 음식의 신비를 밝히며 우리를 요리의 가장 기초적인 세계로 안내한다.

요리는 고대 4원소 '불·물·공기·흙'에 기대고 있다

요리가 인류의 매우 흥미롭고도 가치 있는 일 중 하나이다. 마이클 폴란은 주방(빵집, 낙농장, 양조장, 그리고 레스토랑 주방처럼 요리라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직접 받은 교육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연 상태의 물질이 요리라는 문화적인 형태로 변하는 과정을 다룬다. 요리는 고대의 4원소, 즉 불·물·공기·흙이라는 요소들과 부합할 뿐 아니라 이에 기대고 있다.

요리에서 첫 번째 요소인 ‘불’을 통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초기 형태의 요리를 탐구한다. 즉 그릴에 구운 고기다. 폴란은 불로 요리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뒷마당 그릴에서 시작해, 노스캐롤라이나 동부의 바비큐 화덕과 핏마스터에 이르는 긴 여정을 거친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요리의 기본 요소(동물, 나무, 불, 시간)에 익숙해지면서 선사시대 요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더욱 명확히 알게 된다. 즉 무엇이 원시시대 조상들을 모닥불 곁으로 불러냈고, 이런 경험으로 그들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게 된다. 희생제의는 처음부터 이런 요리를 수반했으며, 불 요리는 영웅적이고 남성적이며 극적이고 우쭐한 기분이 드는 작업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물 요리는 불로 요리한 후라야 가능하다. 요리 재료를 담을 냄비가 발명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요리는 가정의 영역인 실내로 옮겨지며, 여기에서는 일상적인 가정 요리와 기법, 만족과 불만족을 집중 탐구한다. 집과 가족이 요리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공기를 음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법을 터득함으로써, 음식 맛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서구 문명은 대부분 빵에 관한 이야기고, 빵이야말로 최초의 중요한 ‘식품 가공’ 기술의 산물임이 틀림없다. 미국 전역의 다양한 베이커리에서 일어나는 내용을 담았는데, 폴란은 두 가지 개인적인 목표가 있었음을 밝힌다. 하나는 최대한 공기를 함유하고 있으면서도 건강에도 좋은 완벽한 빵 만들기, 다른 하나는 요리가 치명적으로 잘못된 길로 접어든 정확한 순간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인류 문명은 어느 때보다도 음식의 영양가를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식품 가공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앞의 세 가지 요리 방식은 열을 이용하는데, 네 번째는 이와 다르다. ‘흙’ 자체와 마찬가지로 발효의 여러 기술은 유기물을 어떤 상태에서 더 영양가 있고 맛있는 다른 상태로 변화시키는 생물학에 달려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연금술과 맞닥뜨린다. 곰팡이와 세균(이들 대부분은 땅속에 산다)은 창조적 파괴라는 보이지 않는 일에 몰두하면서, 강하면서도 은근한 맛을 내는 강력한 취음제를 만들고 있다.

자연의 재료를 문화의 산물로

마이클 폴란은 자신을 사로잡은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 실상 하나였음을 깨닫고는 행복했다. 바로 ‘요리’였단다.

·개인적 질문:

가족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행복하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십대가 된 아들과 잘 지내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정치적 질문:

보통 사람이 식품 체계를 좀 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하도록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고도로 전문화한 소비 경제 체제에서 어떻게 하면 외부 의존도를 줄이고 스스로 요리를 자주 할 수 있을까

·철학적 질문:

어떻게 하면 일상 속에서 자연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우리 인간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까

리처드 랭엄 박사는 '요리 본능(Catching Fire)'이라는 저서에서 우리 인류가 유인원과 구별되고 인간이 된 까닭은 고대 조상들이 요리하는 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요리 가설’에 따르면, 조리한 음식의 도래로 인류의 진화 과정이 변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에게 에너지 집약적이고 소화하기 쉬운 식단을 제공함으로써 요리는 인류의 뇌가 더 커지고, 내장이 줄어드는 데 일조한 것이다. 몸집이 인간만 한 다른 영장류가 현저히 큰 소화기관을 달고 다니며 깨어 있는 동안 음식물을 씹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데 반해, 인류는 여기에서 해방되면서 신진대사를 위한 자원과 시간을 문화 창조 같은 목적에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요리는 이처럼 우리를 변화시켰고, 더 사회적이고 문명화한 존재로 만들었다.

자연의 재료를 맛있는 문화적 산물로 바꾸기 위한 갖가지 방법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서로 다른 방법들을 암시한다. 이 가운데 폴란이 가장 깊이 이끌린 것은 ‘발효’다. 그는 발효가 정원 가꾸기(폴란은 뛰어난 정원사이기도 하다)와 공통점이 많아서일 거라면서 “술을 빚는 사람, 빵을 굽는 사람, 피클을 담는 사람, 치즈를 만드는 사람들은 정원사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자연과 생생한 대화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일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해관계 속에서 발효에 참여한 살아 있는 생물들과의 작업이며, 우리가 성공을 거두려면 그러한 이해관계들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발효 작업과 관련한 모든 관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발효식품을 만들기로 선택한 우리에게 음식을 대접받고 영양을 공급받는 사람들, 그래서 요리가 맛있기까지 해서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맺는 관계다. 폴란은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와 다른 종, 다른 시대, 다른 문화(인간과 미생물 모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이며 최상의 요리는 친밀감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요리는 단일한 과정이 아니라, 어떤 위대한 사람들도 아직 생각해내지 못한 여러 기술을 한데 묶어놓은 것이다. 불을 통제하는 데서 시작해 특정 미생물을 이용해 곡물을 빵이나 알코올로 변형하여 전자레인지에 넣을 때까지 이 기술들은 다방면을 아우른다. 그래서 요리는 실로 단순한 데서 복잡한 것에 이르는 과정들의 연속이다.

요리의 역설 …요리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요리 행위는 줄어든다

요리가 인간의 정체성과 생명 활동, 그리고 문화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 오늘날 요리 행위가 줄어드는 현상은 우리 생활 방식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것이 나쁘기만 한 걸까? 요리 과정의 상당 부분을 기업에 위탁하면서, 전통적으로 여성만의 책임이었던 가족을 위한 식사 준비에서 많은 여성들이 자유로워졌고, 직장에서 경력을 쌓아가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성역할과 가족 내 역학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 갈등과 가족의 불화를 방지하게 되었다.

장시간 근무 그리고 과도한 일정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압박감을 비롯한 가정에서의 각종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 시간을 절약하게 되면서 다른 취미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 식단이 다양해지면서 요리에 서툴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매일 저녁 다른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전자레인지만 있으면 되니까.

혜택이 커지고 있지만 비용은 커지고 있다. 산업적 요리는 우리 건강과 참살이에 상당한 손실을 끼쳤다.

기업은 매우 다른 방식을 채택하는데, 그래서 요리가 아닌 ‘식품 가공’이라 한다. 설탕, 지방, 소금을 우리가 요리할 때보다 훨씬 많이 사용하며, 또 집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새로운 화학 재료를 사용해 식품 보존 기간을 늘리고 실제보다 훨씬 신선해 보이도록 한다. 그래서 가정식 요리가 줄면서 비만이 증가하고 식단과 연관된 만성 질병이 증가세를 보인다.

패스트푸드의 증가와 가정식 요리의 감소는 공동 식사라는 의례를 서서히 밀어냈다. 각자 다른 음식을 바삐 혼자 먹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공동 식사는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가정생활의 근간이며 아이들이 대화의 기술을 배우고 문명의 습관을 획득하는 기회다. 식사중 이야기를 나누고 듣고 차례를 기다리며 차이를 인식하고 무례하지 않게 논쟁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를 잃고 있는 것이다.

가정식 요리인지, 식품회사가 제조한 패스트푸드인지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가정식과 패스트푸드 두 지점 사이에서 낮 시간의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계속 변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쪽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데워 먹는 것을 제외한 모든 먹을거리를 기꺼이 제공하려는 식품회사들에 이야기와 식사 준비를 맡겨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식품 마케팅 컨설턴트는 “우리는 100년 동안 포장식품을 먹어왔다. 그리고 앞으로 100년간 식사 대용으로 포장식품을 먹을 것이다”고 말한다.

이 같은 현상은 신체의 건강과 가족, 지역 공동체, 우리의 땅뿐만 아니라, 먹는다는 행위와 우리가 사는 세계와의 유대감 형성에도 문제가 된다. 자연 상태의 날것을 익혀서 조리된 음식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점점 낮아지면서 우리는 음식을 달리 이해하게 된다.

완성된 형태로 말끔하게 포장된 음식을 보면, 음식이 자연이나 인간의 노동, 또는 상상력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음식은 또 다른 상품 혹은 추상적 개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 진짜를 합성한 인공물로 음식을 만들어 파는 기업의 손쉬운 먹이가 되고 만다.

자연에서 식탁에 오르기까지, 연결고리 잊지 않기

복잡한 경제에서 분업의 한 가지 문제점은 일상의 행위와 결과의 연결고리, 책임의 한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전문화로 인해 우리는 새로 산 컴퓨터 화면을 밝혀주는 화력발전소의 쓰레기나 내가 먹는 시리얼에 들어갈 딸기를 따는 데 드는 고된 노동, 또는 베이컨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살다 죽어간 돼지의 고통을 쉽게 잊는다. 또한 지구 반대편의 이름 모를 전문가들이 우리를 위해 하는 모든 일들에 우리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끗이 잊어버린다.

어쩌면 요리의 미덕은 세상의 이 같은 존재방식을 과감히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돼지고기 목살을 잘라내는 일은, 이것이 커다란 포유동물의 목살이라는 사실, 완전히 별개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별개의 근육다발로 이루어진 부분이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되새기는 일이다. 돼지가 어디서 어떻게 주방에까지 오는지에 관한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돼지고기는 축산 제품이라기보다 자연에서 얻은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마찬가지로 이 돼지고기와 함께 먹는 채소, 자르기가 무섭게 다시 자라나는 채소를 기르는 일은 자연의 넉넉함을 날마다 일깨워주며, 빛의 광자가 맛있는 먹을거리로 변하는 일상의 기적을 체험하게 해준다.

이런 동식물을 처리하고,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우리가 먹는 음식을 생산하고 제조하는 일을 되찾아오면, 슈퍼마켓과 ‘가정식사대용식’이 모호하게 만들어버렸으나 절대 없애버리지는 못한 수많은 연결고리를 다시금 발견하는 바람직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요리,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사회는 우리에게 적은 역할만을 할당한다. 우리는 직장에서 한 가지만 생산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수많은 상품들을 소비한다. 사실상 모든 욕구와 욕망을 전문가에게 일임하고 있다. 식사는 식품산업에, 건강은 의료인에게, 오락은 할리우드와 미디어 업계에, 정신건강은 테라피스트나 제약회사에, 자연을 돌보는 일은 환경운동가에게, 정치는 정치인에게.

요리는 동식물을 변형시키는 힘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 역시 요리로 인해 단순한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서 생산 쪽으로 조금만 비중을 옮기기만 해도 예상 밖의 깊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요리를 욕망하다'는 미미하나마 우리 삶에서 생산과 소비의 비율을 변화시키자고 권유한다.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이런 단순한 기술을 자주 발휘함으로써 자립도를 높이고 자유를 더 많이 얻고 우리 삶과 다소 동떨어져 있는 기업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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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 전문기자/문화경영학 박사